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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영화 해설 (노동 현실, 가족 갈등, 낙원 상실)

by 영화발견 2026. 2. 28.

어쩔 수가 없다 영화 포스터

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한다면 과연 그 자리는 정당한 걸까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이 불편한 질문을 유머와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저도 취업 준비를 하면서 서류 합격자 명단을 보며 "저 사람들이 지원 취소를 한다면 내가 뽑히겠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만수의 심정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25년 경력의 제지 회사 노동자가 대량 해고를 겪은 뒤 재취업을 위해 벌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다룹니다.

노동 현실을 비추는 제로섬 게임의 비극

영화의 메인 카피는 "사람은 넷, 자리는 하나"입니다. 여기서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란 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이 반드시 잃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만수는 자리가 고정되어 있고 경쟁자를 제거해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 역시 취업 시장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서류 합격자가 10명인데 최종 선발은 1명일 때, 나머지 9명이 마치 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리가 늘어날 수도 있고, 다른 경로로 취업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수의 오류는 이 가능성을 모두 차단하고 오직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법만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노노 갈등(勞勞葛藤)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노노 갈등이란 노동자와 노동자 간의 갈등을 뜻하며, 고용주와 노동자 간 대립인 노사 갈등과는 다릅니다. 만수가 죽이는 대상은 고용주가 아니라 같은 해고 노동자들입니다. 범모와 시조는 파피루스 제지 회사 면접에서 1등과 2등을 차지한 실력자들이었지만, 만수는 면접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만수는 이들을 제거하면 자신에게 기회가 올 거라 착각합니다(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2024년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씁쓸했던 부분은 만수가 가상의 회사 '레드 페퍼'를 만들어 경쟁자들을 유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레드 페퍼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고, 범모와 시조는 파피루스에 이미 합격했지만 그 사실도 모른 채 살해당합니다. 결국 만수의 범행은 부조리한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가족 갈등과 관계의 균열

영화는 노동 문제만큼이나 가족 이야기에도 깊이 있게 접근합니다. 만수의 집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해고 이후 서서히 균열이 생깁니다. 아내 미리는 "이 많은 식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없다"며 두 마리의 개를 친정에 보냅니다. 이는 기업의 구조 조정과 정확히 같은 논리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현실의 많은 가정이 떠올랐습니다. 경제적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약자입니다. 영화에서는 개였지만, 현실에서는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 먼저 잘립니다. 만수는 자신이 관찰한 범모의 부부 관계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범모의 아내 아라가 "당신은 제지 기계를 다룰 때 윤활유를 쓰잖아. 나한테도 윤활유를 줘"라고 말하자, 만수도 집에 가서 아내에게 똑같이 말합니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만수는 범모를 관찰하며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표면적으로만 따라 합니다. 결국 영화 말미에 가족은 다시 모이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의심하고, 아내는 남편을 믿지 못합니다. 딸은 부모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가족의 신뢰는 이미 깨진 상태입니다.

낙원 상실과 회복의 허상

영화는 낙원을 잃고 되찾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수는 어릴 적 아버지가 살던 집을 성인이 되어 다시 삽니다. 창고를 헐고 온실을 지어 식물을 키우며 과거의 상처를 지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 온실 아래에는 시체가 묻혀 있고, 아버지가 베트남전에서 가져온 북한제 권총으로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만수는 살인이라는 극단적 투자를 통해 재취업이라는 수익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가족의 신뢰와 정신적 안정을 잃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는 문 제지에 출근하지만, 회사는 AI 기반 '소등 시스템'을 운영합니다. 불이 하나씩 꺼지는 장면은 만수 역시 곧 해고될 것임을 암시합니다(출처: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AI 도입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향후 더욱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의 허구성이었습니다. 만수는 "나는 종이밥밖에 못 먹는 사람"이라며 다른 선택지를 스스로 차단합니다. 저도 평소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대부분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변명일 때가 많았습니다. 영화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은 핑계이며, 그 핑계가 만들어낸 지옥을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나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입니다. 제지 업계는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고, 만수는 콧수염을 기를 때와 밀 때로 취업 상태를 구분합니다. 벌목(伐木)이란 나무를 베어내는 행위로, 영화에서는 해고를 상징합니다. 나무 밑에는 아버지가 매립한 돼지, 만수가 묻은 시신, 아들이 훔친 핸드폰이 모두 숨겨져 있습니다. 3대에 걸친 비밀이 한 뿌리 아래 얽혀 있는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노동 착취와 가족 해체, 그리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한 편에 담아냈습니다. 코미디 톤으로 풀어냈지만, 웃음 뒤에는 씁쓸함이 남습니다. 저 역시 청년 세대로서 취업난의 현실을 체감하지만, 만수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과연 어쩔 수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끝납니다.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단순한 블랙코미디가 아닌 우리 시대의 민낯을 담은 작품으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naRMazLFH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