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은 선하고, 부자는 악하다는 공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동화와 드라마가 반복해서 심어준 그 공식이 얼마나 단순한 착각이었는지,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설국열차는 바로 그 착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계급의 상대성, 누가 악당인가
영화 속 꼬리칸 사람들에게 머리칸은 분명 착취 구조의 정점입니다. 아이들을 데려가 열차 부품으로 쓰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호위호식하는 집단. 그 시선에서는 머리칸이 곧 악의 집합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머리칸의 시선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탑승한 승객들입니다. 반면 꼬리칸 사람들은 티켓 없이 무단으로 탑승한 이들이고, 윌포드 측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공간과 음식을 내준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도덕철학에서 말하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개념, 즉 각자가 기여한 만큼 자원을 배분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비추면, 머리칸의 논리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분배적 정의란 사회 자원을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를 다루는 철학적 개념으로, 기여도, 필요도, 평등 원칙 중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저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비슷한 장면을 꽤 많이 목격했습니다. 복지 서비스를 제공받는 분들이 한없이 고마워하다가도, 예산 삭감으로 지원이 줄어들면 곧바로 민원과 항의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을 비난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선악보다 생존을 먼저 선택한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는 결국 내가 어느 칸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것이 설국열차가 불편한 이유입니다.
인간 본성, 봉준호가 포착한 냉정한 시선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시선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계급에 귀속된 선악 구도의 해체라고 생각합니다. 기생충에서도, 설국열차에서도 그는 가난하다고 반드시 선하지 않고, 부유하다고 반드시 악하지 않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철학적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시각에서는 머리칸의 풍족한 자원을 꼬리칸에 나누는 것이 옳습니다. 공리주의란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과의 총합,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판단하는 윤리학 이론입니다. 머리칸 사람들의 행복이 조금 줄더라도 꼬리칸 전체의 행복이 훨씬 크게 올라간다면, 전체 효용은 증가합니다.
반면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립니다. 자유지상주의란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타인의 동의 없는 재분배는 그 자체로 권리 침해라고 보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강제로 자원을 빼앗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두 입장 중 어느 하나가 완전히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이 두 논리가 번갈아 가며 맞고, 또 번갈아 가며 틀리는 장면들로 가득했습니다. 의외였던 것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 오히려 심리적으로 더 넓은 관용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이분법적 편견과는 정반대의 경험이었고, 그게 저에게는 꽤 오래 남는 충격이었습니다.
설국열차에서 흥미로운 점은 혁명을 이끄는 커티스 역시 과거에 다른 사람을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도 그는 영웅인가, 아닌가. 저는 이 질문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존의 윤리, 열차는 왜 멈추지 않는가
영화의 결말에서 저는 계급 투쟁의 승패보다 훨씬 묵직한 질문 하나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왜 이 열차는 애초에 멈추지 않고 달려야만 했는가.
이것은 단순한 SF 설정이 아닙니다. 닫힌 생태계 안에서 유지되는 계층 구조는, 외부와 단절된 채 내부의 균형만을 위해 작동하는 모든 시스템의 은유입니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폐쇄적 계층 이동성(Closed Social Mobility), 즉 태어난 계층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구조 자체가 그 고착을 재생산하는 사회 구조를 설국열차는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저는 거창한 재분배보다 앞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국열차가 우리에게 남기는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지금 어느 칸에 있으며, 그 시선이 내 윤리 판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 내가 '선'이라고 믿는 행동이 실은 내 칸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아닌가
- 도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위선이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에게 거창한 도움을 주는 것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더 근본적인 윤리라는 생각, 의료 윤리에서 출발한 'Do No Harm' 원칙이 실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가장 낮은 바닥이라는 것을 저는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여기서 'Do No Harm'이란 의료 윤리의 기본 원칙으로, 어떤 행위든 먼저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 의무를 뜻합니다.
실제로 OECD가 발표한 사회적 이동성 지표(Social Mobility Index)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이 높은 사회일수록 세대 간 계층 이동성이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출처: OECD). 열차가 닫혀 있는 한, 안에서의 혁명은 결국 또 다른 머리칸을 만들 뿐이라는 영화의 결론은 그래서 더 씁쓸합니다. 그리고 국내 연구에서도 소득 분위 간 사회적 유동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음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설국열차는 누가 옳은지를 판결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당장 내 위치에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공존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아직 답을 모르겠다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다시 보시길 권합니다. 두 영화를 이어서 보면, 같은 질문이 훨씬 선명하게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