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버튼 감독이 연출한 2016년 작 판타지 영화 한 편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바로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입니다. 저도 <판의 미로>와 <코렐라인>을 재미있게 본 직후 이 영화를 접했는데, 첫 장면부터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방대한 세계관, 제한된 시간 안에 욱여넣으면 생기는 일
이 영화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제이크가 어떻게 능력을 갖게 됐는지, 루프(Loop)가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 영화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거든요. 여기서 루프란, 특정 날의 시간이 반복되도록 임브린(Ymbryne)이 설정해 놓은 시간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임브린이란 시간을 조작하고 루프를 생성·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여성 별종을 가리키는 용어로, 미스 페레그린이 바로 그 임브린입니다. 이 개념들이 영화 초반부에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처음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지금 과거야, 현재야?"를 되짚어야 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영화는 촘촘한 각본을 가진 작품이 아닙니다. 랜섬 리그스(Ransom Riggs)의 원작 소설은 세계관의 밀도가 상당한 편인데, 이를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 압축하면서 생략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가장 큰 불편함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설정은 분명히 흥미롭고 탄탄해 보이는데, 이야기가 달리기 시작하면 그 설정들이 충분히 소화되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영화가 놓친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루프의 작동 원리와 유지 조건에 대한 설명 부족
- 제이크가 할로우를 식별하는 능력을 물려받은 경위에 대한 구체적 묘사 부재
- 별종(Peculiar)이라는 집단이 역사적으로 어떤 박해를 받아왔는지 보여주는 맥락 생략
원작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빈틈들을 알아서 채워가며 볼 수 있겠지만, 영화만 보는 관객에게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빌런의 아쉬움, 그럼에도 소름 돋는 장면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악당이 좀 약하지 않냐"는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바론(Barron)은 분명히 설정상 무서운 존재인데, 영화가 그를 충분히 위협적으로 그려내지 못했습니다. 할로우(Hollow)라는 존재 자체는 시각적으로 섬뜩합니다. 할로우란 영생을 얻으려는 실험에 실패한 별종들이 흉측하게 변형된 괴물로, 투명한 몸체에 길게 늘어진 촉수를 가지고 있어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설정이 제이크의 능력과 맞물리는 순간은 분명히 흥미로운데, 정작 클라이맥스 대결 장면에서 그 긴장감이 충분히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결정적으로 긴장감을 잃는 지점은 바론이 제이크의 외모를 흉내 내는 장면입니다. 미미크리(Mimicry), 즉 다른 존재의 외형을 완벽히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바론이 제이크로 변신해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은 스릴러적으로 꽤 좋은 소재인데, 해소 방식이 너무 허무하게 마무리됩니다. 이 장면에서 더 정교한 심리적 긴장감을 쌓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엠마가 바닷속 침몰한 배를 공기로 채워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장면, 아이들이 저마다의 기괴한 능력을 합쳐 해골 군단을 조종하는 장면은 팀 버튼 특유의 상상력이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적 상상력의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이 장면들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팀 버튼의 미장센이 서사의 빈틈을 채우는 방식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서사의 허술함을 이렇게까지 비주얼이 메워줄 수 있다는 사실이요.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미장센(Mise-en-scène)에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에서 비롯된 영화 용어로,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구도, 색감, 배우의 위치와 움직임 등을 통해 감독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화면 분위기를 뜻합니다. 팀 버튼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감독 중 한 명입니다.
1943년의 웰스 섬을 재현한 화면은 따뜻하고 바랜 듯한 색감으로, 현실 세계와 명확히 구분됩니다. 폐허가 된 어린이집과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이의 간극, 아름다운 정원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위협. 이런 대비를 팀 버튼은 군더더기 없이 화면 위에 올려놓습니다. 제가 <코렐라인>이나 <판의 미로>를 좋아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맥락입니다. 동화적 비주얼 뒤에 숨겨진 음산함, 그게 다크 판타지 장르가 주는 쾌감이거든요.
국내 영화 등급 분류 기준에 따르면 이 영화는 12세 이상 관람가에 해당합니다(출처: 영상물등급위원회).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 저연령 아동이 편하게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장면들이 존재합니다. 눈알이 없는 시체, 할로우의 시각적 묘사, 그리고 아이들이 별종 능력을 사용하는 일부 장면들은 꽤 자극적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잔혹 동화라는 표현이 이 영화에는 꽤 잘 어울립니다.
참고로 팀 버튼 감독은 독창적인 다크 판타지 미학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영화 예술 측면에서 꾸준히 연구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출처: IMDb). 이 영화 역시 그 연장선에서 바라볼 때 더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뻔한 권선징악 구조나 말끔하게 정리된 해피엔딩을 기대하고 이 영화에 앉으면 조금 허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의 완성도보다 '이 장면을 어떻게 만들어냈을까'를 생각하며 보는 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분명히 무언가를 남깁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기대치를 비우고 팀 버튼의 화면을 그냥 즐긴다는 마음으로 한 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이야기의 빈틈보다 그 분위기가 훨씬 오래 기억에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