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 영화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평소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감기》나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긴박한 상황 속 인간 군상을 다룬 작품들을 재밌게 봤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대홍수》도 박해수와 김다미라는 믿을 만한 배우 조합에, 12월 19일 공개 당시 하반기 기대작으로 꼽혔기에 기대를 품고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108분의 러닝타임이 끝난 후 남은 건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설정, 긴장감을 앗아가다
영화는 초반 소행성 충돌로 인한 대홍수라는 재난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엄마(김다미)와 아들이 침수된 아파트에서 탈출하려는 과정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서부터 몰입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급박한 순간에 화장실을 고집하거나, 비현실적인 장애물이 억지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중반부에 이르러 이 모든 상황이 시뮬레이션(Simulation)임이 밝혀집니다. 여기서 시뮬레이션이란 실제가 아닌 가상 환경에서 특정 상황을 재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화에서는 AI 연구를 위한 가상 실험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엄마는 '이모션 엔진(Emotion Engine)'이라는 감정 연구의 핵심 인물이고, 아이는 실험체인 AI였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미 아이의 메모리만 빼내고 엄마만 탈출했지만, 이모션 엔진 완성을 위해 엄마는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아이를 살리는 퀘스트를 수행하게 됩니다.
저는 이 반전 자체는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재난 영화로 시작해서 SF와 AI 윤리 문제로 전환되는 구조는 분명 참신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영화의 긴장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점입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어차피 가상이니까 어떤 선택을 해도 다시 시도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주인공의 선택에 리스크나 딜레마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2024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중 관객 만족도가 가장 낮은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AI와 모성애, 조합은 좋았지만 설득력이 부족했다
영화의 핵심 소재는 이모션 엔진입니다. 이모션 엔진이란 인간의 감정, 특히 모성애를 AI에게 학습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김다미가 연기한 연구원이 이 기술의 핵심 인물입니다. 영화는 '모성애야말로 AI가 학습하기 어려운, 인간 고유의 감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아이를 가질 계획도 있어서, 모성애라는 주제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미래에 제가 겪을 수도 있는 감정이니까요. 영화에서 김다미는 처음에는 임산부나 다른 이들을 돕지 않다가, 반복되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점점 이타심을 보이는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이 설정 자체는 흥미로웠습니다. 요즘 사회는 예전에 비해 정이 없어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노인을 도와줬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일들이 뉴스에 나오면서, 선의로 도와줬다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거죠(출처: 통계청)의 2024년 사회조타 결과에서도 타인을 돕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이모션 엔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완성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단지 '아이를 살려야만 성공한다'는 논리만 반복될 뿐, 왜 아이를 살리는 것이 감정 완성으로 이어지는지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모성애가 점진적으로 생기는 구조였다면 이해가 갔을 텐데, 영화는 그저 '찾아내야만 성공'이라는 단순한 공식만 제시했습니다.
반복되는 퀘스트, 지루함의 연속
시뮬레이션 구간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김다미는 같은 상황을 반복하며 다양한 선택을 시도하고,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결과를 얻습니다. 이 설정은 RPG(Role Playing Game) 게임의 반복 퀘스트와 유사한데, RPG란 플레이어가 특정 임무를 수행하며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게임 장르를 말합니다. 실제로 저도 영화를 보면서 '무한 반복 퀘스트'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문제는 이 반복이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웬만하면 영화를 재미없다고 느끼지 않는 저조차도 중반부터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루즈했습니다. 같은 장면, 비슷한 대사, 예측 가능한 전개가 계속 이어지면서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박해수가 연기한 요원 캐릭터는 김다미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진 중요한 인물처럼 묘사되다가, 결국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역할이 불분명하게 끝났습니다.
제가 가장 아쉬웠던 점은 선택에 따른 진짜 딜레마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다미가 임산부를 돕거나 아이를 구하는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이 그녀에게 실질적인 손실을 가져다주어야 관객은 긴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든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선택의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러티브 디자인(Narrative Design) 측면에서 치명적인 약점인데, 내러티브 디자인이란 이야기 구조와 전개 방식을 설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재는 좋았으나 실행이 아쉬운 작품
김병우 감독은 《더 테러 라이브》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PMC: 더 벙커》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홍수》는 재난, SF, AI, 모성애를 결합한 신선한 시도였지만, 영화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고, 오히려 망한 작품이라는 입소문 때문에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보게 되는 바이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센세이셔널한 괴작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흔한 재미없는 영화였습니다. 초반 재난 상황의 비현실성, 중반 이후 AI 학습 과정의 디테일 부족, 선택에 리스크가 없는 시뮬레이션 설정 등이 총체적으로 몰입감을 떨어뜨렸습니다. 감독은 아마도 '모성애가 AI와 대척점에 있는 매력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해 이 이야기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엄마와 아들'이라는 종교적 모티브를 활용하려는 의도도 엿보였습니다.
영화는 15세 관람가로, 가족과 함께 보기에는 무리가 없는 등급입니다. 하지만 상영 시간 108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루즈한 전개와 반복되는 구조는 큰 단점이었습니다. 재난 영화로서의 긴장감도, SF 영화로서의 새로운 이야기도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정리하면 《대홍수》는 신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설득력을 모두 놓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 F 등급을 주고 싶습니다. 영화 평가는 개인의 의견이므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되,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시간 대비 만족도가 낮았습니다. 만약 재난 영화나 SF 영화를 찾고 계신다면, 다른 작품을 권하고 싶습니다.